‘영남후보론’은 낡은 여의도식 정치공학의 완결판
제8대 전국 동시지방선거가 더불어민주당의 참패로 막을 내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의 결선투표 역할을 겸했던 6월 1일 지방선거는 더불어민주당에게 고통스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진로 변경을 강요하고 있다. 2002년 이후 20년간 민주당 계통 정당의 대선 필승공식처럼 통용되어온 ‘닥치고 영남후보론’의 가치와 효용에 근본적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남후보론은 본질적으로 나라의 유일하고 정당한 주권자인 인민대중을 장기판의 졸 내지 표 찍는 기계 정도로 간주하는 지극히 오만하면서도 약삭빠른 시대착오적 정치공학의 산물이었다. 호남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영남 태생 후보자가 나타나 경상도 지역에서 적당히 표를 갈라먹으면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전형적인 여의도 구태 정치권식 셈법이었다. 단, 여기에는 세 가지 전제조건의 완벽한 충족이 요구되었다.
첫째는 호남의 지속적 희생이다. 영남 후보론이 득세하는 일그러진 정치풍토 아래에서 호남은 당대표와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 권부의 2인자는 배출할 수 있어도, 대통령 중심제에서의 확고부동할 일인자일 현직 대통령은 절대로 낳지를 못하는 영원한 정치적 배후지 즉 변두리 지위에만 계속 만족해야 했다.
둘째는 경쟁력 있는 영남 후보의 충원과 출현이었다. 민주당이 내세운 영남 출신 대선주자가 능력과 도덕성 양면 모두에서, 정 안 되면 그 중의 한 가지에서만은 상대당 후보를 월등히 능가할 수 있어야 했다. 만약 이러한 요구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민주당이 대선에 출전시킨 영남 후보는 정작 출생지인 경상도 지역에서는 별다른 득표력을 발휘하지 못할 게 빤한 탓이다.
셋째는 국민의힘으로 대변되는 보수 계열 정당이 충청도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능멸한다는 느낌을 줘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민주자유당에서 김영삼(YS)이 김종필(JP)를 토사구팽한 사태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충청권으로의 행정수도 이전을 공공연히 반대한 일은 보수당과 충청도 유권자들 사이를 갈라치기하려는 민주당의 노회하고 지능적인 선거전략에 보수진영이 제대로 말려든 경우였다.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는 더불어민주당이 노무현과 문재인 두 전직 대통령에 뒤이어 세 번째로 야심차게 등판시킨 영남 후보였다. 이재명이 ‘영남후보 불패론’을 철석같이 신봉했을 민주당 고정 지지층의 바람과는 달리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연이어 패배를 겪은 것은 필자가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전제조건들 중에서 적어도 두 가지가 완전히 어그러진 데에서 비롯되었다. 조건들이 불이행된 구체적 내용을 역순으로 짚어보겠다.
첫 번째로 민주당은 국민의힘과 충청도를 분리하는 데 실패했다. 틈을 벌리기는커녕 되레 충청도로부터 철저히 격리당하는 불리한 추세와 구도에 스스로 덜커덕 올라타고 말았다.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충청권에서 신망과 기대가 높았던 반기문 전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을 진보세력에 속하는 언론들과 논객들과 지식인들이 조직적으로 타격해 그를 2017년 대선 레이스에서 조기에 낙마시킨 일은 단지 우연으로 보였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여성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몰락한 사건 또한 우연의 소산으로 비쳤을 따름이다.
더불어민주당, 충청도 잃고 영남도 잃고
그러나 방귀가 잦으면 뭐가 되는 법이다. 충청도에 연고가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을 필두로 문재인 정권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집단적으로 조리돌림하는 광경을 생생히 목격하며 충청권 민심은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마침내 철회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더욱이 지방선거를 며칠 앞두고 충청 지역 중진 국회의원인 박완주 의원이 불미스러운 성추문에 연루된 일은 박완주 개인의 윤리적 일탈을 질타하기 이전에 충청도 유권자들에게는 민주당은 오로지 충청권서 태어난 인사들을 다룰 때만 유달리 단호하고 신속하며 원칙적인 면모를 보인다는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로 민주당은 경쟁력 있는 영남 후보를 더는 발굴하지 못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경쟁자인 이회창 총재와 견주어 도덕성은 뚜렷이 우위였고, 능력에서는 대등한 모습이었다. 문재인은 박근혜를 상대로는 도덕성에선 확연한 우세를 점했다. 문재인이 약했다기보다는 박근계가 너무 강했던 까닭에 그는 대선에서 졌을 뿐이다. 보수당이 박근혜 탄핵의 여파로 드디어 대열이 무너지자 문재인은 영남에서 민주당 후보로서는 역대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보수당이 30대 젊은 당대표 이준석 대표 체제의 출범을 계기로 태극기 부대와 과감히 결별하며 대오를 정비한 상황에서 민주당은 반드시 경쟁력 있는 영남후보를 등장시켜야 했다. 그렇지만 이재명은 국정운영 역량의 증명 단계에서도, 도덕성 검증 국면에서도 윤석열에게 특별한 강세를 누리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를 대통령 선거 투표일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삼일절 기념사를 통해 정통성 없는 불법적인 독재정권의 하나로 개념 없이 무모하게 폄하해버렸다. 이는 영남 지역에 광범위하게 팽만했을 문재인 정부의 ‘호남편중 인사’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김대중 정부 초기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민주당의 동진정책은 하필이면 동진정책 최대의 수혜자인 문재인에 의해 조종이 울렸다.
문제는 조종을 울린 주인공은 문재인이지만 영남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막상 관에 못질을 당한 당사자는 이재명이었다는 데 있다. 영남 지역 출마자들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전멸에 가깝게 줄줄이 낙선함으로써 당의 풀뿌리 조직이 흔적조차 없이 와해될 위기임을 감안하면 더불어민주당은 향후 상당 기간에 걸쳐 영남권에서 삼당합당 시기에 버금갈 암흑기롤 보내야만 할 운명이다.
세 번째로 그렇다면 구 여권에게는 최후의 의지처이자 마지막 믿는 구석일 호남의 일방적 희생은 온전히 변함없이 무탈하게 지속될 수 있을까? 광주시장 선거의 최종 투표율은 겨우 37.7퍼센트였다. 무려 62.3프로의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가기를 포기하거나 아예 거부한 결과다.
물론, 승패가 이미 사전에 정해진 선거인지라 대규모 기권사태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정치 1번지로 군림해온 광주가 전국 17개 광역시도들 가운데 가장 낮은 투표율을 찍은 일은 사람들의 가슴을 웅장하게 하는 모종의 뜨겁고 거대한 정치적 용암이 민심의 저류에 흐르고 있을 가능성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광주의 마그마 덩어리가 어떤 시점에 어떠한 양태로 폭발적으로 분출할지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가 없으리라.
다만 확실한 부분은 그 자신은 창원, 곧 예전의 진해가 고향이기도 한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부류의 영남패권주의 성향 이데올로그들이 집요하고 체계적으로 선동ㆍ유포시켜온 ‘닥치고 영남후보론’이 이제 시효와 약발을 다했다는 것일 테다.
이와 같은 정치지형의 대변동의 후과로 말미암아 호남 민심은 종전과는 분명하게 차별화된 선택을 분연히 감행하게 될지 모른다. 영남후보론의 차가운 굴레와 답답한 족쇄를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겠다는 호남 여론의 변화가 여태까지는 동쪽인 영남으로만 흘러갔던 호남의 표심을 북쪽으로 향하도록 이끌 개연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런 개연성은 서울 서남권과 경기 서남부를 중심으로 금번 지방선거에서 극적으로 현실화된 터이다. (②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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