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잊어도 모욕은 잊지 않는다

신철희 소장은 마키아벨리의 메시지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적절함을 역설했다. (사진 김한주 기자)

공희준(이하 공) :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듯, 운발로 흥한 자 운발로 망하네요.

신철희(이하 신) : 예, 맞습니다. 보르지아의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드르 6세가 열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다음번 교황으로 누가 뽑히느냐가 체자레에게는 흥망성쇠가 걸린 초미의 관심사가 됐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활약하기는 했지만 체자레 보르지아는 본래 스페인에서 태어났습니다. 때마침 차기 교황을 선출할 권한을 가진 콘클라베(Conclave)를 구성하는 추기경들의 3분의 1이 스페인 출신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체자레는 자신에게 우호적 성향의 후보자였던 비오 3세를 로마 교황으로 옹립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행운은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비오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지 채 한 달도 경과하지 않은 시점에 돌연히 선종했기 때문입니다. 비오 3세를 뒤이어 로마 교황청의 수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 저 유명한 율리우스 2세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더불어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유명한 미켈란젤로를 후원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문제는 율리우스 2세가 생전의 알렉산드르 6세와는 교황 자리를 놓고서 격돌한 적이 있을 만큼 앙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경쟁에서 패배한 율리우스 2세는 10년간이나 타지로 망명해야만 했으니 보르지아 가문을 향해 가슴에 맺힌 원망과 억울함이 얼마나 크고 깊었겠습니까?

공 : 뒤끝이 작렬할 수밖에 없었겠네요?

신 : 하필 절체절명의 이 중요한 고비에서 체자레 보르지아의 경험 부족이 여실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리우스 2세의 교황 등극에 도움을 주면 그 반대급부로 로마를 통제하는 경비대의 지휘권과 로마냐 지방의 지배권 등의 기득권을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치명적 착각을 하고 맙니다. 그가 율리우스 2세의 진정성 없는, 허황된 장밋빛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 탓이었습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몰이해가 불운함과 상승작용을 빚어내면서 체사레 보르지아의 급격한 몰락을 재촉한 셈입니다.

공 :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한번 원수는 영원한 원수”라고 설파한 게 이해가 됩니다.

신 : 예 그렇죠. 마키아벨리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과거에 당한 모욕을 절대로 망각하지 않는다고 냉정하게 일갈했습니다.

공 :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김종인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를 설명할 때 빠져서는 안 될 인용문이네요. (웃음) 우리나라에서 잘나가는 분들일수록 예전에 빈정 상했던 사건을 결코 잊지 못하거든요.

신 : 미래에 어떤 도움을 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이 과거의 상대에게 가했던 쓰라린 모멸감을 상쇄시킬 수는 없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어떻게든지 복수를 도모하려고 드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젊은 체자레 보르지아는 이 의미심장한 교훈을 미처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이 일은 아무리 역량이 뛰어나도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이해가 결여돼 있으면 이제껏 공들여 이룩한 성취는 위태위태한 모래성에 불과함을 후세에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공 : 체자레 보르지아가 권력 상층부에서 전개되는 궁정 암투에는 일가견이 있었어도 인민의 바다에 뛰어들어 활동한 경력은 없었던 게 그의 앞길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했네요.

신 : 예 그렇죠. 위대한 창업자들은 평범한 기층대중과 오랫동안 부대끼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민중과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인간의 본성에 바탕을 둔 질기고 단단한 리더십을 훈련할 기회를 풍부히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체자레 보르지아는 아버지의 권력에 기대어 단숨에 손쉽게 군주가 됐습니다. 그는 편하고 빠르게 출세하는 대가로 민중과 나란히 호흡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공 : 밑바닥 삶에 완전히 무지했겠네요. 그곳이 진짜 인민이 생활하고, 진정한 민생이 영위되는 곳인데.

신 : 예. 그로 말미암아 노회한 율리우스 2세에게 일격을 맞고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공 : 소장님 말씀을 들으니 정치권 종사자들끼리만 서로 복닥거리며 동종교배를 거듭하는 우리나라의 여의도는 나라의 미래를 견인할 청년세대가 참다운 리더십을 체득하고 단련할 공간으로는 단연 부적당한 장소로 생각됩니다.

케네디와 습근평의 공통점은

미국의 전 법무부 장관 로버트 케네디는 소련여행 동안 인민의 바다를 항해하며 매카시 추종자에서 진보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이미지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로버트, 우리가 사랑한 케네디」의 한 장면

신 : 중국의 습근평 국가주석의 아버지 습중훈은 중국 공산당의 8대 원로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개국공신이었습니다.

필자는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우리말 발음대로 기재하는 것을 고유한 원칙으로 삼고 있다. 필자 나름의 민족적 자주의식의 발로이다. 이를테면 시진핑이 습근평으로 표기된 연유이다. 이 점 독자들께서 양해해주시기를 바란다.

습근평은 사실상 귀족의 자제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호남성으로 하방해 비좁고 초라한 토굴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왕자에서 졸지에 서민으로 신분이 강등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습근평은 인민들이 실제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이론이 아닌 몸으로 직접 생생하게 학습하게 됐습니다. 그는 이때 배운 살아 있는 체험에 힘입어 미래에 중국을 통치할 강력한 최고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지혜와 안목을 충실하게 기를 수 있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하고 성공적인 정치지도자들은 청년 시절에 인민의 바다에서 민중과 동고동락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력을 증진하고 나라를 영도할 자질을 연마하곤 했습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청년 시기에 각종 범죄들이 기승을 부리고 지독한 가난으로 얼룩진 시카고의 빈민가에서 다채로운 층위의 공동체들을 꾸리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초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경륜과 지도력을 갈고 닦았습니다.

또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전 법무부 장관은 친형인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처럼 암살로 유명을 달리한 비운의 정치인입니다. 케네디 형제는 사후에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우상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정치인으로서의 로버트 케네디의 삶은 두 단계로 구분됩니다. 그는 정치 입문 초기에는 진보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매카시즘에 동조적이었습니다. 그와 극우 냉전주의의 화신이었던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매우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로버트 케네디는 심지어 매카시를 돕는 일마저 서슴지 않았습니다.

공 : 보수도 아닌 꼴보수였네요.

신 : 꼴보수였던 로버트 케네디가 진보주의자로 개심한 운명적 계기가 있습니다. 케네디 형제의 아버지 조셉 케네디는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부자였습니다. 게다가 상원의원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조셉은 아들들이 사회에서 인정되고 존경받는 우수한 엘리트로 자랄 수 있도록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체험 무대를 자식들에게 제공해줬습니다.

그래서 로버트 케네디가 소련의 이모저모를 시찰하는 미국 방문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됐는데,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소련 사회의 참상과 그로 인해 고통 받는 현지 인민대중의 고단한 삶의 현장을 육안으로 목격하면서 그가 발 딛고 서 있는 당대의 사회현실에 새롭게 눈뜨게 됩니다. 당시 케네디를 수행원으로 데리고 소련을 찾았던 윌리엄스 미국 연방대법관은 여행이 계속될수록 로버트 케네디가 몰라보게 성장하고 부쩍 성숙해졌다고 나중에 술회합니다.

공 : 소련 인민에게 연대감을 느끼면서 그와 나란히 미국의 서민들과 손잡는 동지의식에 개안했네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대 체제의 기득권 세력에 분연히 동시에 맞서서 투쟁하기로 결심한 모습을 보면 케네디가의 형제들에게 남들과는 다른 범상치 않은 면모가 있었던 듯합니다. (⑧회에서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