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간성이 역적이 돼버린 사건은 아테네의 경쟁국가인 스파르타에서도 평행이론 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파우사니아스는 그리스 안에 남은 페르시아의 잔존병력을 최종적으로 소탕한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총수로서 맹활약한 인물이었다.
표현상 패잔병이었을 뿐이지, 현대의 사가들이 병력 규모를 10만 명 안팎으로 추정할 만큼의 대군이었다. 파우사니아스는 용장 마르도니우스 휘하의 페르시아군 대병을 플라타이아이에서의 대회전에서 궤멸시킨 여세를 몰아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요충지인 비잔티온마저 단숨에 석권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페르시아는 무력으로 그리스를 넘볼 엄두를 다시는 내지 못하게 되었다.
토사구팽이라고 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기 마련이다. 전쟁에는 전문가였으되 외교에는 문외한이었던 파우사니아스의 무례하고 독단적인 일련의 행위는 스파르타의 동맹국들이 아테네로 편을 갈아타는 빌미를 제공했고, 그러자 스파르타 정부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정부의 징계 조치에 불만을 품은 파우사니아스는 페르시아와 내통해 반역을 꾀하다가 모반이 발각돼 동굴에서 굶어죽는 형벌을 받았다. 전쟁에서의 공로가 참작되어 잔인한 처형만은 면해진 것이다.
비슷한 처지에서 비롯된 동병상련의 심정에서였을까? 혹은 페르시아 제국과의 흥정에서 본인의 몸값을 높이려는 고도의 술책이었을까? 아니면 일이 잘못될 경우 같이 죽자는 물귀신 작전의 발로에서였을까? 파우사니아스는 음모를 획책하면서 그 진행 상황을 테미스토클레스에게 꼬박꼬박 알리며 반란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뭍과 물에서 각각 승리로 이끈 두 남자가 힘을 합치면 반란의 성공은 식은 죽 먹기처럼이나 쉽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파우사니아스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며 스파르타에서 발견된 문건과 서신들은 아테네에 있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들이 살라미스 해전의 수훈갑을 재차 탄핵ㆍ기소하는 절호의 구실로 작용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남에게 지배를 받는 일을 죽기보다도 더 싫어하는 그가 페르시아의 신민으로 비굴하게 살기를 구태여 왜 바라겠느냐고 항변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편지를 고국으로 연달아 띄웠지만 아테네에는 그를 위해 기꺼이 변호에 나서줄 사람이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아테네 민회가 피고인이 참석하지 않은 궐석재판에서 유죄를 선고하기 무섭게 그를 고국으로 압송하려는 체포조가 아르고스로 급파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와 파우사니아스는 권력욕에서는 어금지금했다. 둘 사이에 차별성이 존재한다면 민첩한 생존기술의 유무 여부에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추격자들이 아테네를 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케르키라 섬으로 잽싸게 잠시 몸을 피했다가 발칸반도 서부에 자리해 있던 에페이로스로 이내 또 도망쳤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양대 강국으로부터 모두 쫓기는 도피자의 생활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에페이로스에서도 안전한 피난처를 구하지 못한 테미스토클레스는 남쪽인 몰로시아로 가서 신변보호를 애타게 요청했다.
몰로시아의 국왕 아드메토스는 한창 잘나가던 시절의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도움을 절실하게 구했다가 쌀쌀맞게 면박만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테미스토클레스는 몰로시아 이외에는 갈 곳이 없을 지경으로 외통수로 내몰려 있었다. 그는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아드메토스는 과거에 겪은 수모를 이참에 제대로 갚아주겠다고 단단히 벼르던 참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왕의 어린 아들을 갑자기 끌어안고서 화로 바닥에 꿇어앉는 극단적 방법을 택했다. 당시의 몰로시아에서 이러한 탄원 방법은 애원자의 불쌍하고 비참한 상황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데 사용되는 전통적 관행이었다.
한때 그리스 세계의 맹주로 거만하게 군림했던 사나이가 한 마리 길 잃은 어린양 식으로 나오니 아트메스 왕으로서도 테미스토클레스의 간절한 애원을 더는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자비를 베푸는 일은 때로는 가장 통쾌한 복수법일 수가 있다. 이때가 바로 그런 경우에 속했다. 아트메스는 테미스토클레스를 거둬주는 통 큰 인정을 기꺼이 발휘함에 더하여 그의 처자들도 함께 받아들이는 관대한 아량마저 흔쾌히 베풀었다.
투키디데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거취와 관련해 다른 주장을 개진하고 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서북쪽의 몰로시아가 아니라 동북부의 피드나로 가서 배를 탔다는 이야기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역사가의 효시로 꼽히는 고향 대선배의 주장을 정설로 수용하고 있다. 투키디데스도 플루타르코스도 전부 결국은 아테네인이었다. 필자는 아테네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그들로 하여금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이 오랑캐나 다름없는 변방의 나라에 온갖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비굴하게 몸을 의탁했다고 차마 인정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피드나에서 상선에 승선한 테미스토클레스가 보여준 행동은 몰로시아로 피하며 드러냈을 모습과 비교해 별반 나은 구석이 없었다. 풍랑에 휘말린 선박이 아테네가 점령한 낙소스 섬으로 떠밀려가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 다음 만약에 배를 낙소스의 항구에 접안시키면 뱃사람들이 그의 신원을 알면서도 뇌물을 받고서 태워졌다고 아테네 사람들에게 고자질하겠다며 선주와 선장을 차례로 위협했다. 선박의 운항을 책임진 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테미스토클레스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정치에 입문할 무렵 그의 전 재산은 고작 3탈란톤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대역죄인으로 지목돼 압수당한 액수만 해도 100탈란톤에 육박했다. 그가 보유한 대부분의 자산은 물론 이미 해외로 은밀하게 빼돌려진 뒤였다.
아리스테이데스가 부유하게 태어나 선행을 펼치다 가난하게 죽었다면, 테미스토클레스는 가난하게 태어나 악행과 기행을 마다하지 않다가 부자로 죽었다. 그럼에도 확실한 사실은 아리스테이데스는 입이 아닌 몸으로 진보주의자의 면모를 과시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앞 다르고 뒤 다른 위선을 자행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내로남불의 화신으로 외신에까지 등재된 21세기 한국의 강남좌파들에게는 결코 목격될 수 없는 실천궁행의 품격과 일관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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