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전쟁에 참전한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들은 신성동맹 회의를 개최해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스파르타는 침략자와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나라들을 동맹에서 전부 제외시킬 것을 주장했다. 스파르타가 제시한 방안이 회의에서 관철될 경우 테살리아, 아르고스, 테베 등은 동맹으로부터 배제될 게 명백했다. 세 나라 모두 아테네에 우호적인 국가들이었고, 이들이 신성동맹 가입을 거부당하면 아테네는 동맹 내에서 소수파의 지위로 내몰릴 것이 뻔한 지라 테미스토클레스는 스파르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통틀어 31개 나라들이 당대의 세계 최강국인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하는 연합군에 가담해 피를 흘린 터였다. 대부분 자그마한 도시국가들이었는데, 이들 역시 스파르타가 전후 질서와 판도를 좌지우지하는 일을 바라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자연스럽게 고립되었고, 외톨이가 된 군국주의의 호전적 모국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이를 갈았다. 라케다이몬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또 다른 정적인 키몬을 후원하는 방법을 통해 반격을 시작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내부 분란을 부추김으로써 테미스토클레스의 입지를 흔들려 시도했다.
아테네와는 천적관계에 놓인 스파르타만이 테미스토클레스를 미워한 건 아니었다. 아테네의 공식적 동맹국들 가운데에서도 테미스토클레스라면 치를 떠는 나라들이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동맹국들을 상대로 빈번히 돈을 뜯어냈다. 여기에는 본인의 배를 불리려는 사적인 목적도 개입됐겠지만, 전후의 복구자금이 한 푼이라도 아쉬운 아테네의 국고를 채우려는 공적 동기도 분명 작용했으리라.
현대 미국의 조야는 그리스와 로마가 쌍끌이하는 고대 서양사를 쉬지 않고 되새김질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독일 등의 주요 동맹국들로부터 받아내는 방위비 분담금의 원형이 테미스토클레스가 아테네의 우방국들로부터 수금한 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오고 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섬나라인 안드로스에 가서는 돈을 내놓으라고 독촉하면서 그가 두 분의 신을 모시고 이곳을 찾아왔다고 능청스럽게 지껄였다. 그가 모시고 왔다는 거룩한 신들의 이름은 ‘설득’과 ‘강요’였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건자 그람시의 어법을 잠시 인용한다면 전자는 동의이고 후자는 강제였다.
그람시는 동의와 강제의 적절한 배합이 지속가능한 헤게모니(Hegemony)를 창출함을 통찰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람시가 헤게모니 개념을 창안하기 무려 2천 4백 년 전에 권력의 강약조절에 관해서라면 이미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던 셈이다.
그렇지만 안드로스 사람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빈곤’과 ‘무기력’이라는 신들을 오래전부터 섬겨왔다고 대꾸하며 돈을 순순히 내어줄 의사가 없음을 완곡하면서도 재치 있게 표시했다. 플루타르코스가 테미스토클레스와 안드로스 사이의 논쟁과 관련해 더 이상의 상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사실로 보아 테미스토클레스가 구태여 커다란 물의를 빚으면서까지 안드로스 섬에서 무리하게 돈을 갈취하지는 않았던 성싶다.
반면에 로도스는 테미스토클레스를 겨냥한 뒤끝을 끝까지 작렬시켰다. 로도스의 서정시인 티모크레온은 테미스토클레스를 저격하는 내용이 담긴 시까지 직접 지어가며 그에게 신랄한 야유를 퍼부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고난의 행군을 하던 시절에 티모크레온이 그를 성심성의껏 보살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악명 높은 아테네의 권세가 겸 수완가가 배은망덕하게도 단지 돈 때문에 과거의 은인을 매정하게 외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구체적 사연은 이랬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뇌물을 받는 대가로 사면을 남발했는데, 페르시아에 동조한다는 혐의로 아테네에서 축출된 티모크레온이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추방령의 철회를 개인적으로 간곡하게 부탁하자 그의 옛 후원자에게조차 노골적으로 금품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테미스토클레스 자신이 아테네에서 쫓겨나는 불우한 신세로 전락하자 티모크레온은 그를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풍자시를 발표해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앙갚음을 한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에게 연일 직격탄을 날리는 사태에서 선명하게 목격되듯이, 나이 많은 남자가 일단 한번 빈정이 상해 마음이 토라지면 여간해서는 노여움을 거두지 못하는 법이다.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을 대영제국의 승리로 이끌고도 총선에서 오히려 패배해 총리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쓸쓸하게 이삿짐을 싸야만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처칠과 견주면 상황이 몇 십 배는 더 나빴다. 그는 도편추방의 희생양이 되어 아예 조국에서 퇴출된 탓이었다.
도편추방은 참주로 타락해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인민을 압제할 위험성이 있는 인물들을 사전에 제거하는 아테네 고유의 제도적 장치였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한 미국의 SF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인공지능(AI)과 빅 데이터가 상시적으로 활용될 미래세계에서는 잠재적 범죄자를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선제적으로 미연에 검거할 것이라는 개연성 짙은 예측과 전망에 근거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는 완벽하고 무오류로 보이는 이러한 과학적 범죄예방 시스템에서도 치명적 오류가 생겨난다. 도편추방은 사악한 선동가와 변덕스러운 대중이 결합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그로 말미암아 생사람 잡는 일이 비일비재로 벌어지곤 했다. 권모술수의 대가였던 테미스토클레스는 도편추방의 구조적 맹점을 지능적으로 악용해 아리스테이데스를 숙청한 바 있었다. 도편추방으로 흥한 자 도편추방으로 망한다고, 이제는 테미스토클레스 스스로가 억울하게 거세당할 차례였다.
아리스테이데스와 달리 테미스토클레스에게는 도편추방의 비운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대중이 그에게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에 그는 영리하게 잠시 2선으로 물러나는 노련한 처세술을 발휘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테미스토클레스는 정치적인 피로감을 호소하는 시민들 앞에서 되레 큰소리로 호통을 쳐대는 어이없는 만용을 부렸다.
결정타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건립이었다. 여신을 경배하는 신전이 완공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해당 건축물에 그리스어로 아리스토불레, 곧 ‘최고 조언자’라는 별칭을 스스럼없이 붙였다. 하필이면 자기 집 근처에 신전을 축조한 까닭에 누가 봐도 신전은 아르테미스가 아닌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봉헌된 모양새였고, 따라서 그의 진정한 의도가 뭐였건 간에 테미스토클레스는 동포들에게 그를 신격화하는 개인숭배를 결과적으로 강요하고 말았다.
21세기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최고 통치자를 향한 개인숭배 행태가 별다른 부끄러움 없이 심지어 지식인들에 의해서마저 수시로 자행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고대 아테네에서는 최고 권력자를 최고존엄으로 미화하거나, 또는 꽃길만 걷게 해주겠다며 현직 대통령 옆에서 낯간지러운 가르랑말을 속삭이는 비루하고 추잡한 아부와 아첨의 향연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에는 플루타르코스가 그의 「영웅전」을 집필하던 당시까지도 위풍당당한 풍채의 테미스토클레스의 흉상이 온전히 건재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흉상은 흉상일 뿐, 그 앞에서 어느 누구도 흉상에 절을 하거나 허리를 숙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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